인간과 약물에 대한 나약함

이번에 건강검진을 하면서 그저 간단히 피검사라든지, 엑스레이를 찍든다든지 하는 것 말고 좀더 세심한 검사를 해보자는 취지에서 내시경을 하기로 했다. 이제 먹고 살만 하니까 몸의 건강 상태를 파악도 해봐야 겠다 싶기도 한다. 검진을 해봐야 보험도 들 수 있는 세상이니.

어쨌든 지나가는 말이지만 옛날에는 이런 검사같은 것도 없다보니 그저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거나, 혹은 좋다는 약 다 써봐도 안되고 온갖 효험있다는 민간요법 다 써도 안되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고들 하는 일이 비일비재였다. 그런데 이런 '원인불명'이었던 병들이 정밀검사가 가능하다보니 원래 암으로 죽는 사람이 옛날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에는 통계로 안 잡혀서 암 발생률이 낮았는데 통계로 잡히는 바람에 현대인의 암 발생률도 덩달아 올랐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나. 어쨌든 나도 그 통계에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내시경을 하기로 했다. 그것도 위와 대장을 동시에.

위 내시경과 대장 내시경을 하려면 먼저 장을 비우는 게 필수다. 위에 든 음식이야 금식하면 금새 비워지지만, 대장을 비우는 건 쉽지 않기 때문에 장 세척제를 먹어야 하는데 이번 대장 내시경 전에 내게 주어진 약물에 든 주성분은 sodium phosphate. Na2HPO4와 NaH2PO4를 섞은 것으로서 대장에서 팽창하고 대장 점막에 영향을 주고 삼투압에 의해 물이 흡수되어야 할 대장에서 이온 불균형으로 물이 쭉 빠지게 되니 설사로 이어지는 기계적 관장이다. 인간의 '의지'는 전혀 개입할 수 없다. 흔히 말하는 '생리적 반응'만이 나를 지배하는, 그래서 인간은 나약함에 무릎을 꿇고 대략 2~3시간 내내 화장실을 들락일 수 밖에 없다.

내시경 때에 진정한 '용자'는 비수면 상태에서 내시경하는 것이다. 말 그대로 마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것이다. 어느 누구는 견딜만하다고, 어떤 누구는 손사레를 치는데, 이래저래 속편한 건 수면 내시경이다. 수면 내시경이라고 해서 잠을 자는 건 아니고 정맥마취제를 쓰는 것인데, 이때 쓰이는 데 그 유명한 프로포폴(Propofol)(상품명 디프리반 diprivan)이다. 마이클 잭슨의 사망 원인(영문), (한글)으로 더 유명해졌지만, 사실 많이 쓰이는 전신마취유도제다. 많이 쓰이는 이유는 마취제의 가장 큰 후유증, 즉 hang-over가 거의 없고 오히려 숙면을 취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점 때문이다. 중학교 시절 맹장 수술이 그러했듯 마취 후 회복은 꽤나 고통스럽다. 그런데 이 프로포폴의 마취 능력은 소위 말해 술먹고 '필름이 끊어졌다'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인데 그렇다고 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 아프거나 하지 않다고 보면 된다. 그래서 외래 환자가 와서 간단한 수술을 받아야 할 때(보통 성형외과. 치과는 이산화질소 마취로 다름), 혹은 이런 건강 검진 시 내시경 때에 많이들 쓴다. 또 지나가는 이야기지만, 마이클 잭슨이 불면증으로 시달리면서 주치의가 잠못자는 그를 위해 이걸 투여했다는 것인데 이해할만하다.

어쨌든 검사대에 누워서 내시경을 준비하는 동안, 입에는 위 내시경을 위해 식도가 시작되는 부분에 국소마취제를 뿌렸고, 난 새우잠자듯 누워서 프로포폴 주입을 기다린다. 정말 아주 잠깐이다. 맹장 수술 때처럼 숫자 세기를 시키지도 않았다.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고, 깨어나보니 난 회복실이고,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으며, 정말 벌떡 일어나서, 성큼성큼 일어서서는 '정말 깨어보니 회복실이더라는 말이 맞군요'라며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옷을 갈아 입었다. 그렇게 내가 프로포폴을 투여받은 후 위내시경, 대장내시경을 끝내고 회복실에서 깨어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5분이었다.

인간이란 참으로 나약하다.

by KoKIDS | 2009/08/26 15:51 | 일상에 대한 생각들 | 트랙백 | 덧글(2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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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ommented by 간서치 at 2009/08/27 09:03
제가 바로 그 '용자'였습니다. 멋모르고 그냥 눈뜨고 해봤는데 목에서 걸려 안넘어가니 미치겠더군요. 다음에는 저도 프로포폴 달라고 해야겠습니다.
Commented by KoKIDS at 2009/08/27 13:57
'육체적인 고통을 정신력으로 견뎌낸다'는 걸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. 정신 수양에 도움이 되는 거라면 모를까... 호스가 목구멍으로 들어가고, 항문으로 들어가는 걸 참는 게 정신력을 단련하는 데 큰 도움이 안되는 거 같습니다. :-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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